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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VAC Column] 한·일 사회혁신, 제3의 무대 ‘아시아’에서 만나다


‘사표, 대신 내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내건 스타트업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장난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에는 실제로 퇴직 대행 서비스가 성장해왔다. 상사에게 사직 의사를 직접 전하는 일이 실패와 치욕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 사이를 매개하는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다음의 설명은 무척 흥미롭다. “만일 실패하면 치욕을 느끼게 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중재자가 필요하다...(중략)…퇴직하고자 하는 피고용자의 의사를 고용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현상을 설명하는 문장이 최신 일본 사회학 책이 아니라 1944년에 쓰인 고전 『국화와 칼』에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책은 전시체제라는 특수한 맥락 속에서 ‘멀리서 관찰한 문화’를 다룬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상호작용이 어떤 규칙으로 굴러가느냐’를 읽는 렌즈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사회혁신과 임팩트투자 영역에서 한국과 일본의 상호 교류와 협업이 증가하는 요즘에도 유용하다.

 

『국화와 칼』은 일본인의 삶을 ‘연극’에 비유한다. 여기서 ‘연극’은 위선을 뜻하지 않는다. 역할과 절차가 공유된 상태다. 다시 말해 상호작용의 안전장치다. 일본어로 ‘혼네(本音)’, 즉 ‘속마음’과 ‘다테마에(建前)’, 즉 ‘겉으로 드러내는 말이나 행동’이 대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에서 다테마에는 관계의 규칙을 어기지 않도록 하는 ‘대본’에 가깝다.

 

한일 협업에서 자주 생기는 오해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전제’의 문제다.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거래인가, 관계인가. 거래이면 거래, 관계이면 관계다. 이 출발점이 불분명하면, 이후의 대화는 같은 말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장면을 연기하게 된다. 거래에 기반한 ‘대본’과 관계에 기반한 ‘대본’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혁신은 관계에 기반한 ‘대본’이 특히 중요한 영역이다. 관계를 택했다면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그 관계는 얼마나 예측가능한가?” 일본에서는 철학·브랜드·미션·비전이 명확할수록, 그것이 곧 예측가능성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예측가능성이 신뢰의 재료가 된다. 물론 모든 일본 조직이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이진 않는다. 다만 내가 만난 파트너들 상당수는 ‘속도’보다 ‘절차가 주는 확실성’을 먼저 확인했다. 한국이 ‘감수할 리스크’를 말할 때, 일본은 ‘제거할 리스크(안전)’를 먼저 묻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만난 일본 파트너들 중에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배지를 달고 다니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나는 그 배지가 ‘외부에서 검증된 기준’을 중시한다는 태도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일본 문화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메이와쿠(迷惑)’, 즉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강한 경향이다. 이 경향은 낯선 상대에게 차갑게 군다는 뜻이 아니라, 관계의 안전장치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피한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며칠 전 갑자기 미팅을 요청하고, 첫 만남에서 바로 MOU를 요청하는 장면이 상대에게는 의욕이 아니라 ‘관계 규칙을 건너뛰는 일’로 읽힐 수 있다. 메이와쿠는 예민함이 아니라 ‘아직 규칙이 합의되지 않았는데 판을 흔드는 것’에 대한 경고다. 이는 일본이 더 낫다는 뜻도, 한국이 틀렸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협업의 실패가 ‘의도’가 아니라 ‘설계’에서 발생한다는 관찰이다.

 

그렇다면 다테마에의 ‘대본극’만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혼네가 작동하는 상호작용도 가능하다. 다만 그 혼네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목적이 합의된 즉흥극(improvisation)에 가깝다.

즉흥극이 가능해지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공동 목적이 충분히 명료해야 한다. 둘째, 의사결정·피드백·속도에 관한 최소 규칙이 합의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거절해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 심리적 안전이 확보돼야 한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지면, 대본이 오히려 가벼워진다. 나는 그런 순간에 비로서 ‘혼네에 가까운 대화’가 시작된다고 느꼈다. 

 

필자는 한일 사회혁신의 다음 장면이 서로의 익숙한 시장이 아니라, 둘 다에게 낯선 제3의 무대에서 더 크게 열릴 수 있다고 본다. 그 무대는 ‘아시아’다. 서로의 홈그라운드에서는 속도와 절차의 우선순위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쉽다. 그래서 오히려 제3의 공간에서 공동 목적을 중심으로 규칙을 새로 쓰는 편이 더 빠를 때가 많다. 한국 특유의 빠른 기업가정신은 제3의 무대에서는 ‘민폐’가 아니라 ‘추진력’으로 읽힐 수 있다. 동시에 임팩트 확산이라는 공동의 목적은 일본에게 명확한 예측가능성을 제공한다.

 

MYSC는 일본 파트너들과 함께 아시아에서 이 즉흥극의 무대를 설계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기업가들이 인도와 방글라데시 등에서 포용적 비즈니스를 만들도록 돕고, 현지 기업가들이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시장을 확장할 수 있도록 공동 펀드와 벤처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결국 한일 협업의 핵심은 문화의 우열이나 주도권을 누가 확보하느냐와 관련이 없다. 거래냐 관계냐를 먼저 정하고, 관계를 택했다면 관계 기반의 예측가능성을 설계하는 일이다. 그리고 대본이 필요한 장면과 즉흥극이 필요한 장면을 구분해, 서로가 ‘민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규칙을 합의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대본이 필요한 장면’과 ‘즉흥극이 필요한 장면’을 구분할 수 있는가? 한일 사회혁신의 미래에는 새로운 운영체제(OS)가 필요하다. 필자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있다.


“한일 협업은 ‘속도’가 아니라 ‘예측가능성’을 설계하는 문제다.”

 

[한일 협업의 새로운 운영체제(OS) 체크리스트]

Step 1 목적 정의: 거래(Transaction)인가, 관계(Relationship)인가?

Step 2 신뢰 구축: 관계라면, 속도보다 '예측가능성(철학·미션·지표)'을 먼저 제시했는가?

Step 3 무대 선택: 익숙한 홈그라운드인가, 새로운 '제3의 무대(아시아)'인가?

Step 4 모드 전환: 대본극(절차 준수)이 필요한가, 즉흥극(공동 목적 기반 유연성)이 가능한가?


기고 : 엠와이소셜컴퍼니(MYSC) 김정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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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SOVAC Column] 한·일 사회혁신, 제3의 무대 ‘아시아’에서 만나다 등록일 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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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OV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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