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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Salon] 선을 넘어 확장되는 우리들의 세계: '선 넘는 커리어'

2025.12.24

상세정보

[12월의 Salon] 선을 넘어 확장되는 우리들의 세계: '선 넘는 커리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이 구체적인 직업이 되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경계선을 마주합니다. 영리와 비영리, 수도권과 로컬, 그리고 '나'와 '타인'이라는 선입니다. 지난 12월 18일(목) 임팩트얼라이언스, SOVAC 그리고 일상예술창작센터가 공동 주관한 <선 넘는 커리어> 밋업에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선을 넘나든 세 명의 연사가 그 뜨거운 여정을 공유했습니다. 


황시인(사단법인 무의) : "회사 밖 동료에게 건네는 고백”

발표를 진행하고 있는 황시인 매니저


첫 발표를 맡아 무대에 오늘 연사는 사단법인 무의(장애를 무의미하게, 물리적 심리적 인식의 턱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비영리 조직)의 황시인 매니저입니다. 본격적인 발표 시작에 앞서‘선 넘는 커리어’라는 주제에 맞춰 지난 커리어를 되짚어보니 가 닿고 싶었던 세상을 처음 구체적으로 상상했던, 열아홉 살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었다는 황시인 매니저.

그의 여정은 고3 시절 "가장 멋진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프랑스어를 전공으로 택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2015년 떠난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을 만나며 "꼭 몇 살에 무엇을 하지 않아도 괜찮구나"라는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복학 후 마주한 현실은 달랐습니다. 취업에 대한 압박을 느끼며, 나의 꿈과 장래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규정이 필요하다는 조급함을 느낀 것입니다. 잠시간의 해방감에 이어 예상치 못한 압박감에 혼란을 겪던 그는 도서관에서 만난 문장 하나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황시인 매니저의 발표 자료 장표 중

자신이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아는 것에서 삶의 등고선이 그려진다는 힌트를 얻은 그는 자신만의 등고선을 그리기 위해 7년 반이라는 긴 대학 생활을 보냈습니다. 불문학, 국문학, 중국 교환학생, 교직 이수까지, 어떤 괴로움은 그의 임계점을 넘었고, 어떤 기쁨은 그의 임계점에 미치지 못 하는 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7년 간의 도전 끝에 황시인 매니저는 다시금 ‘내가 꿈꾸는 가장 멋진 세상’을 고민했습니다. 그러자 마음 속에는 "큰 돈을 벌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단순한 다짐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 다짐은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보조기기를 만드는 소셜벤처 '토도웍스'로 이어졌고, 그의 첫 커리어가 시작되었습니다.

황시인 매니저는 장애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 '세일즈 마케터'라는 직함으로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직무의 경계가 없는 스타트업의 현실을 몸소 겪으며 ‘세상이 흔히 말하는 커리어’와 ‘임팩트 생태계의 커리어’의 간극을 직감적으로 배워나갔습니다. 작은 규모의 제조업 특성상 개발, 시험 인증, 공적 급여 등록, AS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며 그는 "도대체 물건 만들어 파는 회사에 세일즈와 마케팅이 아닌 게 어디 있느냐”는 농담을 던질 만큼 경계 없는 실무를 겪었습니다. 세일즈 마케터라는 직함은 경계가 분명한 커리어라고 여겨졌지만, 실무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생태계의 언어를 학습하며 '임팩트 생태계'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꽤나 고단한 시간이었지만 그는 ‘사람이 부족하면 할 일이 많고, 할 일이 많으면 기회가 된다’는 마음으로 소셜벤처의 실무를 몸소 익혔습니다. 입사 6주년 즈음, 그는 비장애인 마케터로서의 고민을 담아 브런치에 '오늘도 휠체어 회사에 출근합니다'라는 21편의 글을 올렸습니다. 회사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일을 기록하는 과정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늘 꿈꾸던 ‘더 멋진 세상’을 더 선명하게 상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커리어가 임계점을 넘고, 새로운 등고선을 만들어갈 시기가 됐음을 느꼈습니다. 그간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권(보조기기)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 어디에나 닿을 수 있는, 접근성(인프라, 환경) 개선을 위해 한발 더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세일즈 마케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지난 6년 간의 다채로운 일들을 어떤 ‘커리어’로 정리해야 할 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점은 그런 그를 읽어주기 위해 준비한 듯한 채용공고가 눈에 띄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올해 초 입사한 사단법인 무의의 채용공고 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전까지 저의 커리어가 너무 특이해서 ‘사람인’ 같은 채용 사이트에서는 내가 이력서를 내볼 만한 채용공고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토도웍스라는 회사에 오래 근무하면서 너무 여기에 최적화된, 하지만 보편적으로 소통하기 어려운 커리어를 만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무의의 채용공고를 보니, 거기에도 지금까지 보지 못 했던 공고가 있더라고요. 꼭 저를 그대로 읽어주는 것 같은 채용공고였어요.”

현재 그는 서울시, 현대로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교통약자 안내표지 개선 사업을 운영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발표를 마치기 전, 황시인 매니저는 3년 전 마음을 울렸던 한 가지 문장을 공유했습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았나? 지역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나? 마음은 평화로운가? 내가 지금 최대한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모리 교수가 한 말인데요. 저에게 커리어 여정은 이러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나만의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아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 동료들을 제 곁에 둔다면 내가 다음에 마주할 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선을 어떻게 넘을지 사실 지금은 전혀 모르겠지만 또 어떻게든 저만의 방법을 찾아 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황시인 매니저는 오늘의 발표를 통해 또 다시 새롭게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선을 기대하며, 회사 밖 동료에게 건네는 고백을 마쳤습니다. 


모민희(베어베터) :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는 10년의 여정"

베어베터(발달장애인이 더 쉽게, 더 오래 함께 일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기업)의 모민희 매니저는 고등학교 수업 시간,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방학도 없이 60세까지 매일 일해야 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이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뿌듯한 일을 하면 매일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했던 그 생각은 대학 시절 동양철학 수업에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다"라는 문장을 만나며 커리어의 확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발표를 진행하고 있는 모민희 매니저

“교수님의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냥 막연히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왜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싶을까?’,  ‘왜 나는 남을 돕고 싶을까?’에 대해 명확한 답을 못 내리고 있다는 생각을 들었어요. 그런데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내가 도움을 받고 싶고, 내가 존중받고 싶었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한다면 나라는 사람도 온전히 존중받고 공존하게 되겠다 싶은 거죠. 이건 단순한 호혜의 시선을 넘어 ‘세상’과 ‘내’가 공유하는 명확한 가치가 바로 서는 그런 감각이었어요. 그래서 ‘아 나는 이거를 내 커리어 가치관으로 딱 삼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 모민희 매니저는 2015년, '청년혁신활동가'로서 일 경험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첫 커리어를 시작한 곳은 바로 홈리스 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하는 '빅이슈코리아'였습니다. 많은 업무 중 하나로 지하철역 앞 빨간 조끼를 입은 판매원들 곁에서 판매를 지원하는 '빅도우미' 업무를 하며 그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빅이슈코리아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안 보이고 안 들렸던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렇게나 눈에 띄는 빨간 조끼를 입고, 목청껏 판매를 하시는 데 어떻게 몰랐나 싶기도 한데요. 이게 저의 일상이자 목표가 되니까 지하철역마다 서계신 그 분들이 제대로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 거에요. 그 자립의 외침이. 전 이때, 저의 세계와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었어요.”

나의 세상이 넓어졌다는 그 생생한 감각, 그가 임팩트 생태계에 머물게 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모민희 매니저 발표 자료 장표 중

빅이슈코리아에서 5년 정도 근무한 후, 모민희 매니저는 시야와 커리어를 확장하기 위해 이직을 결심했습니다. 제품을 다루는 회사였는데, 호기롭게 시작한 것이 무색하게도 새로운 시도는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낯설었던 그 때의 시행착오를 통해 "나에게는 '사람'이 키워드여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을 향하는 솔루션이 자신의 방향성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은 모민희 매니저는 그렇게 발달장애인이 일하는 회사 '베어베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베어베터에서의 경험 역시 그의 시야를 더욱 넓혔습니다. 이전에는 지하철에서 혼잣말을 하거나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낯설고 두려운 마음에 피하기 바빴지만, 이제는 그들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공공장소에서 혼잣말을 하거나 어떤 말을 크게 반복하거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발달장애인이실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 상동행동을 하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유를 알 수 없는 흥분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스스로 마음을 진정하는 행동을 하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거죠. 이런 확장을 체감할 때마다, 저의 세계라는 도화지 안에 이제는 홈리스도, 발달장애도 들어와 다채로워진 느낌입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공존의 풍경입니다.

물론 ‘내 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고민은 여전합니다. 명확한 직함이 부러울 때도 있고, 늘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자문해야 하는 ‘깨어있음’이 버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깨어있음이 곧 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롱런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간마다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무엇을 하면 내가 편해질지 고민해 보세요." 그는 10년 차 활동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존재들에 대한 감사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돌보는 지혜를 강조하며 발표를 마쳤습니다.


박누리(로컬 저널리스트·기록자) : "서울과 정답이라는 선을 넘는 옥천의 기록자"

발표를 진행하는 박누리 로컬기록자의 모습


충북 옥천에서 16년째 살며 지역 잡지 '월간 옥이네'를 만들었던 박누리 전 편집장에게 '선'은 일종의 ‘애증의 단어’입니다. 

구미에서 나고 자란 그가 청소년기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바로 “성공하려면 서울가야지”였습니다. 꼭 서울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력이 된다면 대구 정도는 가서 놀아줘야 본새가 나는 어린시절을 겪으며, 그에게는 늘 ‘구미라는 선’을 넘어가기를 종용하는 시선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시선이 곧 ‘지역에 남는 이들은 패배자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막연한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는 누리님은 지역에서도 저마다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합니다.

“나도 지금 구미에 살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도 여기에 살고 있고 내 친구도 여기에 살고 있고, 심지어 ‘성공하려면 서울에 가야지’ 라는 말을 하는 본인조차 구미에 살고 있으면서 왜 저렇게 이야기하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지역에서 계속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 좀 그런 막연한 고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외부의 시선과 강요가 아닌, 스스로 선을 넘어야겠다 생각한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비 오는 날 폐지는 줍는 할아버지를 보며 ‘저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 세상을 알리는 기자가 되겠다’라는 꿈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기자 채용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언론정보학과 4학년, 서울의 대형 언론사 채용 절차를 밟으며 그 어렵다는 2차,3차 합격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던 게 이거였나?"하는 마음의 소리가 그를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역에서 계속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오던 청소년기의 그가 보내던 목소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 누리님은 운명처럼 '옥천신문'의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옥천신문은 한국 1세대 풀뿌리 지역신문으로, 어느날 학부 교수님께서 스치듯이 언급한 이후 내내 마음에 남았던 곳이었습니다.

함께 기자 채용을 준비하던 친구들은 극구 말렸지만, 그는 한 달간의 합숙 면접 끝에 옥천으로 이주했습니다. 구미를 넘어 서울의 언론사를 향한 것이 선을 넘는 최초의 경험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지역을 선택한 것은 그가 인생에서 넘은 가장 최초의, 가장 큰 선이었습니다.

연고 없는 옥천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달팠지만, 지역사회는 그에게 '민주주의 학교'가 되어주었습니다.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면 결코 몰랐을 공동체적 책임감을 몸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면에서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를 해도 신문을 보는 사람은 줄어갔습니다. 기사만으로는 지역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는 신문사를 나와 사회적 기업에서 ‘월간 옥이네’ 창간을 돕고 후에 편집장이 되어 직접 제작에 나서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는 기자라는 직무를 지면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을 제안하고, 동물권 조례를 만들며, 소외된 여성 농민들을 지면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기사는 사람과 사람을 엮고 대안을 제시하며 변화를 추동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열정은 월 20일 야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스케줄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심각한 번아웃과 우울증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잘하면 모두가 따라올 것이라는 오만이 저를 서서히 망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고 말하며, 건강이 망가진 후에야 지금의 방법론은 지속 불가능한 방식임을 깨달았습니다. 

“‘지역 잡지는 창간호가 곧 폐간호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폐간 공식을 깨고 '100호 발행'이라는 종지부를 찍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저의 건강을 돌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100호까지 무사히 마친 것에 안도합니다. 이제는 조금 더 지속가능하면서도 내내 꿈꾸던 ‘지역에서 계속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의 다음 고민은 ‘외롭지 않은 지역 활동’입니다. 맹목적인 지지가 아니라 때로는 따가운 질책도 해줄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농촌의 밀밭 풍경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커리어란 더 멀리, 더 높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정한 미래와 겹쳐지지 않더라도 나답게 사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옥천의 밀밭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바다 없는 충북에서 파도 소리를 내는 밀밭처럼,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한계를 넘나들며 나를 주어로 삼는 선택을 계속해 나가자고 말입니다.

박누리 로컬 저널리스트의 발표 자료 장표 중


[패널 토의] “우리의 선은 서로의 멱살을 잡아줄 때 비로소 연결된다”왼쪽부터 백현지, 황시인, 모민희, 박누리 참여자의 모습

현장의 열기가 무르익은 저녁, 루트임팩트 백현지 매니저의 진행으로 세 연사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루트임팩트 내 ‘임팩트커리어’ 담당자로서 ‘지독하게 커리어 이야기만 하는 팀에서 일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백현지 매니저는 ‘선 넘는 커리어’에 가장 적합한 모더레이터였는데요. 익숙한 듯 하지만 동시에 정의가 매우 어려운 임팩트 생태계의 커리어가 본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부하기 위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Q1. 영리에서 비영리로의 선, 무엇이 가장 다르던가요?

백현지: 시인 님은 토도웍스라는 소셜벤처(영리)에서 무의(비영리)로 넘어오셨어요. 발표 때는 '월급만 나오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어렵지 않게 옮겨오셨다고 쿨하게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어떤 ‘발견’이 있으셨나요?

황시인: 사실 이전 회사 본부장님께 이직 소식을 전했을 때 "시인아, 왜 굳이 비영리로 가려고 하니?"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저는 큰 차이를 몰랐죠. 그런데 와보니 쓰는 언어부터 달라요. 영리 기업에 있을 때 주무부서가 중기부였다면 지금은 ‘사랑의열매’와 소통하죠(웃음). 가장 큰 체감은 ‘수익’의 방향이에요. 영리는 이익을 회사 마음대로 수익을 배분 해도 되지만, 비영리는 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나에게 오지 않고 온전히 세상으로 가거든요. 그러다보니 보상에 대한 고민들도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만큼 채워지는 게 있어요. 무의는 제 가치관을 끊임없이 물어봐 줘요. 어떤 결정을 할 때 "이 일이 너에게도 진심으로 다가오니?"라고 끊임없이 묻고, 수평적으로 소통하죠. 비영리는 물질적이거나 경제적인 보상을 주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의 가치가 나에게 얼마나 진심인가가 그 일을 끝까지 해내게 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Q2. 분야가 바뀔 때의 두려움, 전문성이 흩어지지는 않을까요?

백현지: 민희 님께 묻고 싶어요. 홈리스(빅이슈)에서 발달장애(베어베터)로 키워드가 바뀌었잖아요. 많은 청년이 "한 분야만 파야 전문성이 생기는 게 아닐까" 혹은 "다른 사회문제로 옮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거든요.

모민희: 저도 호기롭게 ‘사물’ 파는 회사에 갔다가 일주일 만에 악몽 꾸고 도망친 흑역사가 있어요. 회사 분들은 정말 좋았지만, 그 전 만큼 동력이 생기지 않아 불안감이 커졌어요. 그때 깨달았죠. 나한테는 무조건 '사람'이 키워드여야 한다는 걸요. 빅이슈에서 홈리스 분들을 보며 제 세상이 넓어졌던 것처럼, 베어베터에서 발달장애 사원들을 만나며 또 한 번 시야가 확장됐어요.

가끔은 "저 개발자예요, 마케터예요"라고 자신의 직무를 명쾌하게 정의하는 분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이제는 제 성인 ‘모’씨처럼 한 번에 못 알아듣는 제 직업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앞서 말씀드렸지만 "지속 가능한가? 가치 있는가?"를 계속 고민하며 깨어 있는 것 자체가 전문성 아닐까요? 사람이라는 본질만 같다면, 대상이 바뀌는 건 전문성이 흩어지는 게 아니라 도화지에 다채로운 풍경을 채워 넣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Q3. "내 일도 아닌데 왜?"라는 선 앞에서 어떻게 당당할 수 있나요?

백현지: 누리 님은 기자가 기사만 쓰는 선을 넘으셨어요. 사실 소셜섹터에서는 "A 직무라고 들어왔는데 왜 Z까지 다 해야 하냐"는 원성이 많거든요. 누리 님을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나요?

박누리: 제 기준은 "세상을 바꾸는 기자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어요. 지역 기자는 기사를 쓰고 마트에 가면 주민과 마주쳐요. 칭찬도 받지만 멱살도 잡히죠(웃음). "밤길 조심해라" 같은 협박을 듣기도 하고요. 출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삶으로 피드백이 바로 오니까, 기사로 안 풀리는 문제는 직접 팔 걷어붙이고 기획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16년 전보다 확실히 더 나은 사람이 됐어요. 사회를 이해하게 됐고, 직무의 바운더리에 갇히지 않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도 안 하니까 나라도 한다"는 마음이 결국 저를 확장시켰습니다.


Q4. 동료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응원, "멱살을 잡고서 라도 함께 가자"

백현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서로가 서로의 ‘회사 밖 동료’가 되어줄 분들이에요. 선을 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주면 좋을까요?

박누리: 저는 동료들에게 "지치고 쓰러질 때 서로의 멱살을 잡아주자"고 말해요. 딴짓하지 못하게, 지쳐 있으면 일으켜 세워주고 엇나갈 땐 따끔하게 뺨을 쳐줄 수 있는 ‘동지’요. 맹목적인 지지도 좋지만, 따가운 질책도 해줄 수 있는 그런 끈끈한 관계를 여러분이 많이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민희: 나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해요. 발달장애 사원 면담을 하다가 제가 너무 지쳐서 멍하니 있었는데, 사원이 "매니저님 괜찮으세요?"라고 묻더라고요. 그때 정말 미안하고 아차 싶었죠.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남도 도울 수 없어요. 힘들 땐 동료에게 일을 미룰 줄도 아는,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는 다정한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황시인: 무의에서 저보다 20살 많은 선배들의 열정을 보며 '나도 저렇게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럼에도 제가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기에 여기까지 흘러 왔고, 비슷하게 조각된 여러분을 만나 다행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맺어진 선이 또 다른 새로운 선으로 연결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행사 전 ‘어떤 선은 반드시 넘고, 어떤 선은 넘지 말아야 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백현지 매니저는 "오늘의 강의를 듣고 나니, 반드시 한 번은 넘어야 할 선이 무엇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10년 차, 11년 차, 16년 차. 각기 다른 시간의 궤적을 그려온 연사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커리어의 선을 넘는다는 것은 결국 ‘나다운 선택’을 통해 더 넓은 세상과 연대하는 과정이라고요. 지금 여러분이 마주한 선은 무엇인가요? 혼자가 두렵다면, 여기 당신의 멱살을 기꺼이 잡아줄 동료들이 있습니다. 우리 지치지말고, 계속 이야기 나누어요!


[잠깐만요! SOVAC Salon 워크북 받아가세요!]
혹시 '선 넘는 커리어'에 관해 더 많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혹은 이번 행사에서 들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나의 이야기로 정리해보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그런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아래 첨부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면 12월의 SOVAC Salon을 관통하는 공통 질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을 적어보며, 나에게 '선 넘는 커리어'란 무엇인지 한 번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나아가 뒷장에는 해당 질문과 유관된 연사들의 답변을 엮어두었으니, 마치 오붓한 Salon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듯 워크북을 활용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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