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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기고] 코로나 이후 치유와 힐링

프로필 이미지 박*욱(sa**********)

2021.04.13 09:49:31 1,689 읽음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박상욱 교수는 동대에서 화학으로 이학박사, 영국 서섹스대에서 과학기술정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문위원,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행정학회 디지털×그린뉴딜특별위원장, 한국정책학회 과학기술정책특별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글.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박상욱 교수




팬데믹은, 끝난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미 팬데믹이 종식된 뒤에 이 글을 접할 것이다. 그렇다면, 팬데믹은, 끝났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류는 천연두, 페스트, 콜레라, 홍역, 결핵, 스페인 독감 등 무시무시한 팬데믹을 여러 차례 겪었다. 많은 희생을 치렀다. 어떤 전염병은 아예 사라졌고 어떤 전염병은 그 위험이 관리 가능한 정도로 줄었다. 역사의 교훈은, 팬데믹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힘을 빌리면 그 끝을 앞당길 수 있다. 




각국 정부의 팬데믹 종식 선언은 다분히 정치적인 액션일 것이다. 진짜 종식은 보통 사람들이 전염병의 공포에서 벗어나 팬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염병의 위협에 무덤덤해져서일 수도 있고, 장기간의 방역 조치에 지쳐서일 수도, 생계 전선으로의 복귀를 도저히 더 늦출 수 없어서일 수도 있다. 

바이러스가 덜 치명적인 것으로 변이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겪어 항체를 갖게 되면 팬데믹은 사그라든다. 백신은 완전무결하지 않지만 집단면역을 앞당기는 무기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거다. 팬데믹은 끝난다. 단순미래다.


COVID-19 팬데믹으로 인류가 입은 피해는 그야말로 막심하다. 아스라진 인명은 돌이킬 수 없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물적, 정신적 피해를 복구하고 재난을 극복해 낼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큰 생채기를 입은 문명의 몸뚱어리에 흉터가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흉터는 새 살로 메워지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흐려진다. 치유의 과정이다. 같은 말인데 ‘힐링’이라고 하면 미묘하게 어감이 달라진다. 동명사가 되면서 주체의 적극적 행위가 강조되는 느낌이다. 팬데믹을 벗어나며 자신과 타인을,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를 ‘힐링’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힐링이 고프다.




혹자는 코로나로 인한 산업ㆍ경제적 피해가 현대 자본주의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견해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데, 금융위기처럼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약점과 모순이 곪아 터진 경우와 달리 코로나는 생물계로부터 근원한, 경제체계 입장에서는 외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 산업과 경제는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팬데믹 이전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복원탄력성이 크다. 움츠러들었던 만큼 튀어 오를 수도 있다. 각국 정부의 경기부양책과 소위 ‘보복 소비’ 심리가 맞물려 경기 호황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거시적으로 보면 산업과 경제의 회복은 걱정할 거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치유가 절실한 것은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부분이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 심리적 차원이, 각각의 요소들보다는 관계의 차원이 치유의 핵심이다.


공동의 적과 싸우면서 공동체 의식이 함양된 측면도 없지 않지만, 팬데믹 이후까지 이어진다는 기대는 금물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은 팬데믹의 피해가, 남겨진 상처의 크기가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약간의 불편에 불과했겠으나 어떤 이에게는 절체절명의 치명상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 살아낸 것은 팬데믹이 끝나는 날을 기어이 보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오기 덕분일지도 모른다. 난리통이 끝나 정신이 돌아오면 비로소 상처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느껴질 것이고, 타인의 ‘생각보다 말짱함’에 시기심도 일 것이다. 



팬데믹을 비롯한 사회적 재난의 피해는 취약 계층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취약하다(fragile)는 말 자체가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고 위기를 이겨낼 여력이 작다는 뜻이다. 팬데믹을 겪어 내는 동안에는 모두 함께 힘들다고 생각되지만, 팬데믹 이후 손에 쥘 피해 정산서를 보면 피해의 불평등이 드러날 것이다. 전우는 와해되고 공동체의 위기가 닥친다. 

명심하자. 팬데믹이 끝난 후에 가일층 적극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어려운 계층과 집단을 돕고, 품고, 돌보아야 한다. 정부가 책임질 부분이라고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모두를 위해 나서야 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는다. 팬데믹은 새로운 관계 맺기를 가로막았다. 사람들은 집합금지를 겪고서야 한 데 모이는 일의 의미를 깨달았고, 사적 모임 금지를 겪고서야 세상을 공적 관계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의 석상에서 평행선만 그어 대던 상대와 ‘뒤풀이’ 자리에서 서먹함을 무릅쓰고 마주친 맥주잔이 의외의 타협을 낳기도 한다. 사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공과 사가 뒤섞인 것이다. 

사적 이해가 공적 판단을 뒤집는 폐해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사적 친밀함은 공적 관계의 작동을 돕는다. 공적 관계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한 국가간 정상회담에 부부동반 만찬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친밀함을 형성하는 것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관계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함께 식사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공통된 인연과 공유하는 기억을 찾는다. 



팬데믹은 친밀함을 앗아갔다. 이 상실의 피해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집중된다. 새로운 사회관계자본을 확충해야 할, 그래서 사회생활의 밑천으로 삼아야 할 젊은이들이 빈곤해졌다. 2020년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비대면 수업을 들으며 사이버 학교에 다녔다. 학교라는 중요한 사회화 장치를 제대로 써 보지 못한 것이다. 

2년제 대학이나 대학원 석사과정생의 경우는 안쓰러울 지경이다. 등교도, 제대로 된 학교 생활도 해보지 못한 채 졸업을 맞게 된다. 신입생 환영회, 동아리, 세미나, 엠티, 지도교수 면담 없이 교문을 나서는 것이다. 학교가 단지 수업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곳이 아님을 우리는 강제로 체감하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재택근무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공간의 제약을 극복할 정보통신기술이 충분히 발달하고 출퇴근길 교통지옥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왜 ‘사무실’이라는 시스템이 여태 유지되고 있는지, 왜 회의실에 모여야 회의가 되는지 비로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많은 식당들이 단지 끼니를 때우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적 모임에 인원 제한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이미 친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만 만날 수 있었고, 느슨한 관계망이 확장될 기회는 크게 줄었다. 


사회관계자본을 이미 축적한 기성세대에게는 타격이 작지만, 이들과 관계를 형성해야 이들로부터 이것저것 물려받을 수 있을 젊은이들은 타격이 크다. 팬데믹 이후에 젊은 세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다. 의식적으로 잡아 끌어줘야 할 것이다.


시민과 국가 사이의 권력 관계 문제는 과제로 남겨진다. 팬데믹은 일종의 전시상황이다. 특수한 규칙을 적용해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행동을 통제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팬데믹과의 전쟁이 끝나도 이적행위자나 적군에 부역한 자에 대한 처벌이나 패한 측에 대한 보복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이러스에 부역한 자는 없으니.


그러나 정부가 방역을 이유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프라이버시를 경시하고, 인권을 희생하고, 감시와 통제의 달콤함에 맛들이게 된 것은 우려스럽다. 행정학계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예로부터 순응(compliance)의 문화에 익숙하여 정부에 협조를 잘 하는 편이다. 반면 자신들의 손으로 군주를 끌어내리고 목을 달아 자유를 쟁취해 본 서구 시민들은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쉽게 드러내는 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팬데믹 초기 몇몇 나라에서 나타난 저항을 ‘민도 낮은 행태’로 치부하며 끌끌혀를 찼다. 물론, 정부의 방역 조치에 적극 협조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위를 지키는 이타적인 행동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불가피해 보이는 조치들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지적이 묵살되는 것은 아쉽다.


봉쇄는 불편하고 QR코드는 간편하다. 동선과 사생활이 ‘털리는’ 것을 감내하고라도 활동을 영위하는 것은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선택이다. 팬데믹이 끝나고 나면 이 선택에 대한 갑론을박이 뒤늦게 일어날 것이다. 팬데믹을 끝낸 일등공신이 소위 K-방역이 아니라 백신인 것으로 판가름 난다면, 또 백신 접종이 굼떠 주요국들에 비해 팬데믹 종식 선언이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이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팬데믹이 끝나면 식당 입구의 QR코드 리더기와 지자체 홈페이지의 확진자 동선 공개는 사라지겠지만, 언제 어떤 감염병이 돌아 다시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세상 질병 중 많은 것들이 바이러스, 박테리아, 기생충 등 병원체에 의해 옮겨지는 감염병이며, 감염병의 위험을 가늠하는 것은 모호하다. 통제의 강도를 정하는 기준들은 복합적이고 종종 상충되며, 결정은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팬데믹이 끝나면 정부와 시민이 마주 앉아서 공중보건의 위험 관리를 위한 통제와 시민의 자유 사이의 균형에 대해 허심탄회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거쳐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을 지키기로 약속해야 한다. 시민들은 이제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교통카드, 신용카드 결제내역, 수만개의 공공 CCTV 카메라를 통해 아주 쉽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시(surveillance)는 벤담의 판옵티콘처럼, 본래 권력이 다중에 대해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휴대전화에 카메라가 달리고 차량 블랙박스가 기본이 되면서 시민들 상호간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진화했다. 유비쿼터스화된 상호감시는 권력에 의한 감시의 독점을 와해하고 그 존재감을 희석시켰다. 그런데 팬데믹은 고전적인 감시를 첨단 과학기술의 조력과 함께 부활시켰다. 팬데믹이 끝나도 빅 브라더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오래 갈 것이다. 




산불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재해로 인해 생태계가 손상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시스템은 회복력(resilience)을 가지고 있다. 충격을받은 생태계는 이내 재조직화(reorganization)에 나선다. 다음으로 성장기를 거쳐 다시 안정화로 진행되는 주기(cycle)가 있다. 

예를 들어, 불타버린 숲에서 땅속에 남아 있던 뿌리와 씨앗이 다시 싹을 틔우고, 시간이 지나 생장하여 숲을 회복한다. 회복력의 관건은 충격을 입기 전의 시스템이 얼마나 강건했는지에 있다. 일반적으로 종의 다양성(diversity)이 클수록 회복에 유리하다고 생각된다. 회복이 협력과 상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사회 공동체를 생태계로 보면, 팬데믹은 생태계를 덮친 재해다. 팬데믹 이후 우리는 공동체 생태계를 이전처럼, 나아가 이전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회복할 것이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으로 회복시킬 것이냐는 회복의 힘에 달려 있다. 회복의 힘은 사회 공동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의 골이 깊었다면, 사용자와 노동자가 서로를 적으로 보았다면, 이념과 정치색에 따른 진영논리가 팽배했다면, 단일한 가치관이 강요되고 다양성이 억압되었다면 팬데믹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은 오래 걸리거나 심지어 요원할 것이다.

경제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보다 앞세운다면 사람들은 회복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회복기를 남을 제치고 앞서 나갈 기회로 삼는 이기적 쟁투를 벌일 지 모른다. 결국 코로나 팬데믹 이후 치유의 길은 사회적 가치에 있다.



팬데믹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여러 소중한 것들을 박탈하거나 일시정지 시켰고 역설적이게도 그것들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인간은 군집 생활을 하는 사회적 존재이며 팬데믹 위기 속에서 개체주의적인 ‘합리적 경제인’ 가설은 빛이 바랬다. 위기 극복과 상처 치유는 혼자서 할 수 없다. 사회 공동체 생태계에서 다양한 주체들을 관통해 엮는 공유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며 이의 총합이 사회적 자본이다. 코로나 이후 치유 과정에서 사회적 자본이 역할을 하게 되는데, 사회적 자본은 물적 자본과 달리 경합성이 없어서 사용할수록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코로나 팬데믹 치유에 사용되는 사회적 자본은 치유의 과정에서 더욱 증가할 것이다. 팬데믹 이후를 얘기함에 있어서 사회적 가치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