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회적가치연구원 펠로우 김지민
Intro: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한국판 데스게임 <오징어 게임>이 결국 역대 넷플릭스 흥행 시리즈 1위에 등극하면서¹,“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구호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BTS, 기생충, 미나리의 성공에 번번이 숟가락 얹기를 시도하더니 드디어 잘 들어 맞는 예시를 찾은 모양이다. 국뽕이니 민족주의니 잠시 넣어두고, 나는 다소 다른 의미에서 저 구호에 동의하고 싶다. 오징어 게임 만큼 한국적인 작품도 없을 듯 하다. 목숨까지 걸고 한다는 게임이 고작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구슬치기’여서만은 아니다. 진정한 한국적 색채는 그 모든 게임을 관통하는 ‘공정성’에 있다.
오징어 게임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1인이 상금 456억 원을 모두 가져가는 승자독식 구조다.
게임의 운영자는 참가자끼리의 우발적 살인은 물론, 진행요원이 탈락자의 시신으로 장기밀매를 하는 것까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온갖 반인륜적 행위를 눈감아주는 와중에 허용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게임의 룰을 교란하는 것이다. 게임운영자는 장기매매에 연루된 진행요원 일당과 이들을 도와주는 대가로 다음 라운드의 게임 정보를 미리 제공 받던 의사 출신 참가자를 사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의 순수한 이념을 더럽힌 최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 이념이 바로 공정성이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이들이 살인을 저질러서도, 장기밀매를 해서도 아니다. 분노는 '모두에게 공정한 게임을 위해 게임 정보는 사전에 공개되지 않는다'라는 오징어 게임의 제1원칙을 어겼다는 것에서 나온다.
“이 게임 안에선 모두가 평등해. 참가자들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지.
바깥 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 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바깥 세상과 다르게 이곳에서는 모두가 공평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운영자의 자신감에 찬 어조와 함께, 이 게임에서 공정성은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제1 가치가 된다. 어떠한 가치보다, 심지어 생명보다 공정성이 우선한다. 공정성은 그 정도로 신성한 것이다. 어?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우리의 ‘공정한’ 게임은 오징어게임을 닮았다
CSES 펠로우십 프로젝트로 <Z세대 사회참여동인 분석 연구(가제)>를 준비하며 소위 요즘 청년 세대를 분석한 보고서를 읽을 기회가 꽤 있었다. 무분별한 세대 구분이나 “요즘 애들 특이해~”식의 세대 프레임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눈에 띄는 공통적인 표현이 있었다. 우리가 공정성에 남다른 감각을 가진 세대라는 거다. 대체로 요즘 청년 세대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정의롭다는 식의 설명이었지만, 다른 사회문제는 다 제쳐두고 유독 공정성 이슈에만 분노한다는 뉘앙스가 깔려있었다. 찔리는 걸 보니, 아주 정확한 분석인 듯하다.
그런데 모든 사회문제에 분노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공정성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청년들이 그토록 민감해하는 공정이란 절차적 공정성(procedural justice)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결과를 떠나서 그 과정이 얼마나 공정한가의 문제다. 한때 이런 정치적 모토가 유행했더랬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면 결과는 정의롭다는 명제로 변모했다. 그렇게 과정의 공정성만 보장되면 개인이 오롯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안게 된 것이다. 이 명제가 위험한 이유는, 애초에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오징어 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운영자의 말처럼 정말 오징어 게임에서는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고 있을까? 3라운드인 줄다리기 게임만 봐도 알 수 있듯, 어떤 게임은 분명 특정 성별과 연령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게다가 애초에 이 게임은 이미 사회에서 ‘패배자’로 낙인 찍힌 이들에게만 제안되었다. 이것이 정말 자발적인 참여일까 의문이 들지만, 합의했다는 이유로 개인 참가자는 그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한다. 설사 그것이 목숨일지라도 말이다. 게임을 이런 식으로 불공정하게 짜 놓고, 규칙을 어겼을 때만 왕창 분노하면 그게 공정이 된다.
현실의 게임은 얼마나 다른가. 멀리 갈 것 없이 11월에 큰 이벤트가 있다. 이 게임은 너무나 공정하(다고믿)기 때문에 개인이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며, 결과로 인한 차별은 쉽게 정당화된다. 수능, 즉 대학 입시 경쟁게임의 이야기다. 어쩌다 입시 비리라도 발생하면, 우리는 공정성 카드를 꺼내며 오징어 게임의 운영자와 똑같은 말을 한다.
“이 게임(수능) 안에선 모두가 평등해. 참가자들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지. 바깥 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 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바깥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게임의 공정성에 집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유사하다. 대입만큼은 공평한 경쟁으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발현된 것이다. 따라서 청년 세대가 말하는 공정성은 오징어 게임의 공정성을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혹자는 너무 멀리 간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동일시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운이고 대입은 능력이니까.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선을 명확히 긋기도 쉽지 않다. 운이 개입하지 않는 100% 능력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수시가 됐든 정시가 됐든, 어떤 게임 라운드가 특정 집단에 유리하게 짜여진 것은 여기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우리의 공정한 게임은 오징어 게임을 닮았다고.
(중략...)
[1] 10월 13일,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을 시청한 구독 계정이 1억 1100만을 돌파하며 넷플릭스 역사상 최다 가구가 시청한 작품이 되었음을 공식 발표했다. 오징어 게임 이전까지 넷플릭스 시청률 1위는 ‘브리저튼’이었다.
- SV Hub '우리의 ‘공정한’ 게임은 오징어게임을 닮았다' 칼럼 전문 보기 -